아카데미가 선택한 작품은 대니 보일의 <슬럼독 밀리어네어>였다. 왠지 아카데미라면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선택할 것만 같았는데, 그래서인지 이러한 아카데미의 선택은 <슬럼독 밀리어네어>에 대한 호기심을 더 자극해내기 충분했다. 영화는 자랑이나 하듯 수상내역을 늘어놓으며 관객들에게 우리가 이정도야 라고 엄포를 놓으며 시작된다. 그리고 퀴즈쇼 무대에서 펼쳐지는 영화답게 관객을 향한 물음이 던져진다. "자말은 어떻게 백만장자 퀴즈쇼에서 최종상금이 걸려있는 마지막 단계까지 오를 수 있었을까" 이러한 물음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자말의 삶에 더 주목하게 되는 장치로 작용해 몰입도를 더 높여준다.
영화는 크게 세가지 시선에서 전개된다. 슬럼가에서 자라 정규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콜센터의 차 심부름꾼인 자말이 어떻게 변호사나 의사도 가기 힘들다는 최종문제에 도달했는지에 대한 추궁을 위한 고문을 받고 있는 상황과 이러한 상황 속에서 비디오 테이프 속에 펼쳐지는 퀴즈쇼, 그리고 퀴즈쇼의 문제들을 자말이 맞출 수 있었던 이유인 자신의 삶에 대한 복기로 이루어져 있다. 퀴즈쇼 최종문제까지 도달한 자말을 의심하는 상황이야 충분히 이해는 된다만, 저러한 방식으로 대응하는 모습이 고졸에 무직따위가 어떻게 경제를 전망하냐는 미네르바를 향한 비아냥같기도 한 것이 내심 흠짓하기도 했다. 어쨌든 허무맹랑할 수 있는 전체를 아우르는 스토리는 절묘한 균형감각을 유지하며 세가지 시선 속에서 긴장감있게 진행된다.
사실 자말과 같이 퀴즈쇼의 문제들이 자신의 삶 전체를 관통하기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자말의 기억 속에 펼쳐지는 인도 빈민가에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이, 자말만의 특별함이었는지 아니면 인도 사회가 겪어야 했던 당연한 수순인지 모르겠지만, 지난 날 생사의 최전선에서 무법과 불법을 경계를 오고가야만 했던 사회적 물음과 함께 어쩌면 저러한 기적은 자말이 겪어온 삶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적 가치로 치환될 수 있겠다는 영화적 수긍에 이르른다. 자말의 삶 속에서 피부 깊숙이 각인되었던 것들이 퀴즈쇼 문제로 치환되는 판타지에 나름의 설득력을 가져다준 것이다.
하지만 정작 자말이 퀴즈쇼에 참가하게 된 경위가 밝혀지면서 흐름은 그의 치열한 삶의 투쟁의 결과가 모두 운명이란 하나의 단어에 귀결되고 만다. 라띠까와의 사랑을 운명적인,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루질 수 밖에 없었던 사랑이라 말하고 싶은 마음이야 알겠다만, 그렇다고 해서 자말의 삶 전체가 정해진 운명 속에 순응한 삶라고만은 볼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쉽게 단정지어 맥빠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 있어 자말의 퀴즈쇼를 지켜보는 인도인들의 모습은 그저 씁쓸하기만 하다. 그들은 자말을 통해 신분상승에 대한 대리만족을 느끼며, 자신들 역시 자말과 같은 로또적 희망을 꿈꾸며 살아간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진짜 로또와 같은 자말에게 일어난 우연을 운명이라 단정지어 버려, 아무도 자말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시인해 버린다. 이러한 운명적 결말은 자말을 지켜보는 인도인들에겐 그저 희망고문 속에 치열한 현실과 맞닿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삶의 처연함을 더해준다. 그리고 여기에 자말이 우승할 수 밖에 없었던 운명이라는 노골적인 고백이 더해지며 씁쓸함에 정점을 찍어 버린다. 마지막에 살짝 유치한 뮤지컬적 뉘양스를 풍기는 자말과 라띠까의 춤사위가 아름답지만은 않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지나치기 쉽지 않은 이유가 관객의 입맛에 딱 맞아 떨어지는 절묘함이 있기 때문이다. 인도 빈민가의 좁은 골목길을 쫒는 카메라와 이를 뒤따르는 이질감있는 음악의 하모니는 마치 뮤직 비디오를 보는 듯한 색채감을 느끼게 하기 충분하며,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속도감있는 구성은 120분을 전혀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준다. 여기에 환호할 수 밖에 없는 짜릿한 해피엔딩은 만족감마저 안겨다 준다. 그럼 점에서 볼 때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흥행무비로썬 공감하겠지만, 아카데미가 선택했단 것에선 살짝 의구심이 남기도 하다.
8.5점
영화는 크게 세가지 시선에서 전개된다. 슬럼가에서 자라 정규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콜센터의 차 심부름꾼인 자말이 어떻게 변호사나 의사도 가기 힘들다는 최종문제에 도달했는지에 대한 추궁을 위한 고문을 받고 있는 상황과 이러한 상황 속에서 비디오 테이프 속에 펼쳐지는 퀴즈쇼, 그리고 퀴즈쇼의 문제들을 자말이 맞출 수 있었던 이유인 자신의 삶에 대한 복기로 이루어져 있다. 퀴즈쇼 최종문제까지 도달한 자말을 의심하는 상황이야 충분히 이해는 된다만, 저러한 방식으로 대응하는 모습이 고졸에 무직따위가 어떻게 경제를 전망하냐는 미네르바를 향한 비아냥같기도 한 것이 내심 흠짓하기도 했다. 어쨌든 허무맹랑할 수 있는 전체를 아우르는 스토리는 절묘한 균형감각을 유지하며 세가지 시선 속에서 긴장감있게 진행된다.
사실 자말과 같이 퀴즈쇼의 문제들이 자신의 삶 전체를 관통하기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자말의 기억 속에 펼쳐지는 인도 빈민가에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이, 자말만의 특별함이었는지 아니면 인도 사회가 겪어야 했던 당연한 수순인지 모르겠지만, 지난 날 생사의 최전선에서 무법과 불법을 경계를 오고가야만 했던 사회적 물음과 함께 어쩌면 저러한 기적은 자말이 겪어온 삶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적 가치로 치환될 수 있겠다는 영화적 수긍에 이르른다. 자말의 삶 속에서 피부 깊숙이 각인되었던 것들이 퀴즈쇼 문제로 치환되는 판타지에 나름의 설득력을 가져다준 것이다.
하지만 정작 자말이 퀴즈쇼에 참가하게 된 경위가 밝혀지면서 흐름은 그의 치열한 삶의 투쟁의 결과가 모두 운명이란 하나의 단어에 귀결되고 만다. 라띠까와의 사랑을 운명적인,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루질 수 밖에 없었던 사랑이라 말하고 싶은 마음이야 알겠다만, 그렇다고 해서 자말의 삶 전체가 정해진 운명 속에 순응한 삶라고만은 볼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쉽게 단정지어 맥빠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 있어 자말의 퀴즈쇼를 지켜보는 인도인들의 모습은 그저 씁쓸하기만 하다. 그들은 자말을 통해 신분상승에 대한 대리만족을 느끼며, 자신들 역시 자말과 같은 로또적 희망을 꿈꾸며 살아간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진짜 로또와 같은 자말에게 일어난 우연을 운명이라 단정지어 버려, 아무도 자말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시인해 버린다. 이러한 운명적 결말은 자말을 지켜보는 인도인들에겐 그저 희망고문 속에 치열한 현실과 맞닿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삶의 처연함을 더해준다. 그리고 여기에 자말이 우승할 수 밖에 없었던 운명이라는 노골적인 고백이 더해지며 씁쓸함에 정점을 찍어 버린다. 마지막에 살짝 유치한 뮤지컬적 뉘양스를 풍기는 자말과 라띠까의 춤사위가 아름답지만은 않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지나치기 쉽지 않은 이유가 관객의 입맛에 딱 맞아 떨어지는 절묘함이 있기 때문이다. 인도 빈민가의 좁은 골목길을 쫒는 카메라와 이를 뒤따르는 이질감있는 음악의 하모니는 마치 뮤직 비디오를 보는 듯한 색채감을 느끼게 하기 충분하며,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속도감있는 구성은 120분을 전혀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준다. 여기에 환호할 수 밖에 없는 짜릿한 해피엔딩은 만족감마저 안겨다 준다. 그럼 점에서 볼 때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흥행무비로썬 공감하겠지만, 아카데미가 선택했단 것에선 살짝 의구심이 남기도 하다.
8.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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