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지.아이.유격대라는 알았어도, 지.아이.조는 몰랐는데, 그놈이 그놈이었나 보다. 아무튼 <지.아이.조 : 전쟁의 서막>을 보는 내내 분쇄되어 있던 기억의 조각들을 끼워맞추는데 주력했다. 하지만 피규어에 대한 기억은 있어도 스토리에 대한 기억은 당최 되살아 나질 않았다. 이런 영화에 그깟게 뭐가 중요하겠냐만은, 친절하지 않은 인물들에 대한 설명이 보는 내내 기억을 나노마이트에 점령당한 것 마냥 찝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아이.조 : 전쟁의 서막>은 117분의 러닝타임 동안 CG로 쳐발라진 스크린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영화였다.

<지.아이.조 : 전쟁의 서막>은 딱 여름에 볼 만한 액션 영화의 모든 것을 제대로 뽑아내고 있었다. 시작부터 물량공세가 대단하다. 스피디한 액션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들며, 머지 않은 미래에 이런 기술들을 얼마나 구현해 낼 지 모르겠으나, 휘황찬란한 갖가지 무기들이 보여주는 비주얼은 만화의 실사화가 무엇인지 증명시켜 준다. 게다가 그 웅장하고 거대한 스케일은 진짜 이것들은 제대로 뻥카를 치고 있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너무나 극명한 선과 악의 구조나 저급한 스토리의 완성도, 들쭉날쭉한 캐릭터에 대한 이해, 여전히 미국이 만세라는 세계관, 이따위 불편한 요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화려한 비주얼이 주는 쾌감이 이를 충분히 상쇄시키고도 남는다. 앞선 불편한 감정 따위나 이병헌이 왜 닌자야 하는 애국심에 도취된 분노를 잠재우고, 어릴적 무뇌의 상태에서 놀이터 흙바닥에서 피규어를 가지고 놀던 그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그 당시에 느꼈던 피큐어가 하나씩 들어갈 때마다 자신의 전투력이 상승하는 것 같던 착각 못지 않은 만족감을 충분히 가져다 준다.


이병헌은 충분히 돋보였다. 예전 <스피드 레이서>의 비만큼의 기대감이 없어서인지 몰라도, 이병헌은 <지.아이.조 : 전쟁의 서막>에서 보여진 악의 무리 중 가장 멋진 활약을 보여줬다. 워낙 다른 캐릭터들의 액면가가 떨어진 탓도 있지만, 아무튼 하얀 도복으로 무장된 모습도 그렇고, 뭔가 사연이 있는 듯한 우수에 찬 눈빛도 그렇고, 스네이크와의 대결에서 보여진 조각같이 다듬어진 근육질의 몸매도 그렇고, 전혀 흠잡을데 없었다. 여기에 어색할 수 있는 영어 발음에 약간의 기계음이 섞인 듯한 음색을 만들어 버리니, 양키들 사이에서도 전혀 이질감없이 녹아들 수 있었다.

<지.아이.조 : 전쟁의 서막>는 제목 그대로 이제 시작인 것이다. 하지만 걱정되는 것이 앞선에서 너무 빵! 터트린 나머지 후속편에 갈수록 힘이 딸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이다. 사막을 뒤집어 놨으며, 에펠탑을 무너트렸고, 빙하마저 깨부셔놨으니, 이제 어딜 부셔놓는단 말인가. 이제 남은 것은 우주? 아무튼 무더운 여름에 빵빵한 에어컨 바람 나오는 극장에서 무뇌의 상태로 눈과 귀를 스크린에 모두 맡긴 채 117분 동안 더위를 잊고 지내기엔 제격이다. 역시 여름엔 액션이고, 그 액션 갈등을 만족시켜주는 것이 <지.아이.조 : 전쟁의 서막>이다.

8.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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