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월드컵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이다! 그리고 아르헨티나에 감사한다. 90+3분의 경기 시간이 끝난 뒤 선수들이 모여서 기도를 하고, 이영표가 하늘을 향해 "오~ 주여"를 외치는 입모양을 보며, 진짜 행운의 여신이 우리 편이었다는 것을 동감했다. 1승1무1패, 승점 4점, 5득점 6실점. 지난 2006 독일월드컵 때와 3득점 4실점만 다를 뿐인데, 그때는 짐싸고 돌아와야 했고, 지금은 16강 진출이란 쾌거를 이뤄냈다며 다들 대한민국 만세란다. 심지어 병역혜택 얘기까지.

하지만, 마치 화장실에서 변비와 30분간 투쟁한 끝에 겨우 한 덩어리 밀어내고 일어서려는데, 휴지가 없어서 그냥 나온 듯한 찝찝함이랄까. 경기 종료 횟슬을 듣고도 주먹을 불끈 쥐고, 해냈다는 성취감보단 아르헨티나가 이겨줘서 다행이다란 안도감이 더 했다. 그만큼 나이지리아전에서 한국이 보여준 경기력은 16강에 진출하기엔 민망한 경기력이었다. 즉, 우리가 잘해서 16강에 진출했다기 보단 그리스와 나이지리아가 못해서 16강에 진출한 기분이다. 여태 실점했던 부분만 봐도 딱 상대의 공격력에 비례해서 실점한 느낌이다. 주구장창 크로스만 올려댔던 그리스에선 무실점이었지만, 개인기와 스피드가 강했던 아르헨티나나 나이지리아 공격수들한테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니 말이다.

▲ 단독 찬스를 맞이한 마르틴스 ⓒ SBS 캡쳐


그런 점에서 자블라니에도 감사한다. 물론, 다 자블라니 덕은 아니겠지만, 우체의 중거리 슈팅이 골포스트를 강타한 것이나 당연히 실점이겠거니 했던 야쿠부와 마르틴스의 슈팅이 골대를 벗어난 것을 보면, 분명 자블라니도 한몫 했을 것이니 말이다. 사실, 결정적 기회만 놓고 본다면 4대2 정도로 졌어도 이상하지 않을 경기였다. 그만큼 나이지리아 공격수의 결정력이 좋지 못했고, 한국 수비도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한국은 나이지리아의 핵심 선수라 할 수 있는 미켈이 빠졌음에도 경기를 장악하는데 실패했다. 점유율은 약간이나마 높았을지 몰라도 중원을 장악하는데는 분명 실패했다. 이는 중원에서 압박을 해줘어야 했던 기성용이나 김정우가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물론, 그 둘만을 탓하기엔 무리가 있다. 전체적으로 압박 수비를 제대로 펼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 골포스트에 맞은 우체의 중거리 슈팅 ⓒ SBS 캡쳐


압박 수비의 핵심은 단순히 볼을 쫒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공간을 잡는 것에 있다. 볼을 잡은 상대가 가는 길목을 협력 수비로 차단해 주며, 패스 길목을 미리 선점함으로써 볼을 가진 선수를 고립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우체의 중거리 슈팅 장면을 보면, 카누가 프리 상태에서 볼을 잡자 허겁지겁 김정우가 카누를 쫒았고, 카누가 우체에게 패스하자, 이번엔 조용형이 허겁지겁 쫒아 나왔다. 이에 우체는 가볍게 조용형을 제친 뒤, 거리낌없이 슈팅을 때릴 수 있었다. 수비 앞선의 공간을 내준 상태에서 선수마저 놓친 최악의 상황이었다.

▲ 차두리의 실책이 가져온 첫 실점 ⓒ SBS 캡쳐


뿐만 아니라 수비 집중력에도 큰 문제를 나타냈다. 첫 실점 장면은 분명 차두리의 집중력 부재가 만들어낸 참사였다. 아무래도 수비가 두 명이나 붙어 있다보니 크로스가 제대로 못 올 것이라 생각했는지, 상대의 크로스를 안일하게 처리하려 했고, 이에 우체는 기민한 움직임으로 한발 더 빠르게 슈팅으로 가져갔다. 문제는 이러한 수비 집중력 결여가 경기 내내 드러났다는 점이다.

▲ 이정수의 실수로 실점 위기를 맞이하기도 ⓒ SBS 캡쳐


후반 앞서고 있는 상황에서 이정수는 수비에서 나가는 쉬운 패스를 두번이나 연속으로 차단 당하더니 결국 야쿠부에게 단독 찬스 내주고 말았다. 야쿠부가 한반자 빠르게 슈팅했거나 동료에게 내줬으면 속절없이 실점으로 이어질만한 장면이었다. 그나마 김정우가 빠르게 들어와 걷어내면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동적인 장면에 상대의 스피드나 개인기에 밀려 찬스를 내주는 것은 실력에서 밀리는 것이기에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정적인 장면에서 집중력 결여로 상대에게 찬스를 헌납하는 실수는 반드시 고쳐져야 할 부분이다.

그리고 허정무 감독. 이런 졸전을 펼쳐 놓고도 언론에선 또 결과만 놓고 최고의 명장으로 색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수비뿐만 아니라 공격도 그다지 칭찬할 만한 부분 전술이 없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총 5득점 중에 세트피스에서 나온 득점이 3점이며, 상대 실수와 박지성, 이청용 개인 기량이 협쳐져 만들어낸 득점이 2점이다. 결국, 공격수 간의 호흡이나 미들과 공격 간의 패턴 플레이로 만들어진 득점은 없단 얘기다. 하다 못해 크로스 이후 헤딩 슈팅으로 만들어진 골조차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격력으로 조별 예선을 무실점으로 끝낸 우루과이 수비진을 뚫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물론, 반대로 지루한 경기 끝에 세트피스에서 골을 뽑아낼 수도 있다는 긍정적인 부분도 찾을 수 있겠지만, 세트피스라는 것이 심판 성향에 따라 경기 내에서 주어질 수도 있고,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기에 그것에만 기댈 수는 없는 부분이다.

또, 2대1 상황에서 김남일의 투입. 사실 김남일의 투입 자체만 놓고 본다면 나쁘지 않은 교체였다. 스코어 상 앞서곤 있었지만, 중원에서 효과적으로 경기를 풀어가지 못했기에 상대를 압박하기엔 충분한 교체 카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교체 상대가 기성용이 아닌 염기훈이었단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염기훈을 그대로 뒀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공격수를 빼고 미드필더를 넣는다는 것은 결국 지키겠다는 의미인데, 김남일이 투입됐던 시점이 그리스와 아르헨티나가 0대0 무승부 상황이었기 때문에, 혹시모를 그리스의 갑툭튀 득점에 대비해 좀더 골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즉, 아르헨티나가 앞서고 있던 상황이라면 염기훈과 교체해 시키는 것이 맞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기성용과 교체했어야 했다. 하지만, 결국 염기훈을 교체하면서 박주영을 원톱으로 만들어 고립시키는 상황만 가져왔고, 경기 주도권을 상대에게 내주는 상황만을 초래했다.

▲ 교체로 들어와 기도만 한 김동진 ⓒ SBS 캡쳐


그리고 그 많은 공격수들을 데려가 벤치만 달구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애초에 제대로 된 선발 자원을 뽑지 않은 것도 문제지만, 그렇다면 효과적인 교체 카드를 사용함으로써 주전 공격수의 체력적 부담을 덜어줌과 동시에 교체 자원들의 경기 감각을 끌어올려 줬야 하는데, 경기 막판이 되서야 김동진과 박주영을 교체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같이 기도하라고? 분명, 토요일에 16강 경기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그렇다면 진작에 헐떡거리는 박주영의 체력적 안배를 해줬어야 했다. 아르헨티나가 득점환 상황에 지키기로 돌아섰으면 이승렬이나 이동국을 투입해 이후 16강을 대비해 경기 감각을 끌어 올리게 했어야 했다. 그런데, 현실은 그리스전에서 이승렬 5분, 아르헨티나전에서 이동국 10분 뛰게 한게 다다.

이러한 한국 상황을 보면 애초에 목표가 16강이었으니, 이제 우루과이와의 경기는 그저 보너스라 생각하고 마음을 비우고 보는 것이 더 나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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