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발은 필패라던 진리가 다시 한번 증명됐다. 그리스전 승리 이후 우리 팀의 사기가 올랐던 것도 있었고, 다른 조에서 이변이 일어났던 것도 있었지만, 그래도 아르헨티나인데 설레발이 너무 심했다. 좀더 냉정하게 그리스전을 돌아봤어야 했는데 말이다. 모 커뮤니티에서 아르헨티나 경기 예상을 3대0 으로 했다가 개까였었는데, 막상 4대1로 대패하고 나니 통쾌하기 보단 씁쓸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16강에 대한 자력 진출이 가능하기 때문에 아르헨티나전을 냉정히 평가해 나이지리아전을 승리할 필요가 있겠다.

처음 4-2-3-1로 나온다고 했을 때부터, 혹시나 뻥축구? 라고 우려는 했었지만, 실제 그렇게 할 줄은 몰랐다. 인터뷰에서 허정무 감독이 맞뿔로 나온다고 하기에 김정우, 김남일을 수비형 미들로 두고, 양박쌍용이 모두 공격적으로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박지성은 중앙에서 메시 전담 수비였고, 염기훈, 이청용은 사이드에 협력 수비하기 바빴고, 박주영은 이리저리 헤딩만 하러 다녀야 했다. 그러한 패턴은 후반전에도 계속됐다. 수비부터 차례로 볼을 돌리면서 상대를 끌어내기 보단, 모조건 정성룡의 골킥에서 공격이 시작됨과 동시에 볼을 넘겨줬다. 이럴 것이면 뭐하러 미들에 그리 많은 숫자를 뒀는지. 그냥 다 수비?

▲ 공격의 시작과 끝은 정성룡의 발에서 ⓒ itv sport 캡쳐


역시나 오범석의 선발 출전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기술에는 기술로 상대한다던 허정무 감독의 생각이 완전히 빗나가 버렸다. 오범석이 월드컵 첫무대에서 상대하기엔 상대가 너무도 강했다. 디 마리아, 메시, 테베즈는 시종일관 오범석을 공략했고, 오범석은 너무도 무력하게 무너졌으며, 손을 잡거나 반칙으로 끊어서야 그들의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 그정도로 오범석은 철저히 공략 당했다. 이영표가 메시를 앞에 두고도 크로스를 허용하지 않았던 것과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 그리고 메시가 사이드가 아닌 중원에 있다보니, 김정우나 기성용이 협력 수비를 들어가기에도 너무나 애매했다.

그렇다고 오범석 대신 차두리가 나왔다고 해서 그보다 잘 막았을 것이란 생각은 않는다. 오히려 힘과 스피드만 빠른 차두리가 잘 뚫렸을 수도 있다. 문제는 오범석이 뻔히 공략 당하고 있음에도, 그 쪽에서 무수히 실점이 나오고 있음에도 아무런 변화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허정무 감독의 인터뷰를 보면, 그리스전에서 차두리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했는데, 그렇다고 최소한 우영표, 좌동진으로라도 변화를 줬어야 했다. 하지만 오범석은 풀타임으로 90분 내내 상대를 골문 앞까지 친절히 안내해 줬다. 이것은 전적으로 감독의 탓이었다.

▲ 이런 상황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 itv sport 캡쳐


그리고 교체 타이밍은 공격에서도 잘못 됐었다. 2대1 상황에서 염기훈이 기회를 날려버린 후 공격수 교체 타이밍을 가졌어야 했다. 애초에 4-2-3-1에서 원톱 박주영을 뺄 수는 없었고, 4-4-2로 변화를 준 뒤, 이승렬과 같이 빠른 발로 뒷공간을 노릴 수 있는 선수를 넣었어야 했다. 아르헨티나도 2대2로 경기를 마친다면, 16강 진출을 낙관할 수 없기에, 분명 공격적으로 나올 것이었고, 그렇다면 2대1 상황에서 변화를 줬어야 했다. 하지만, 허정무 감독은 이미 승부가 기울어 진 뒤에야 이동국을 투입했다. 도대체 무슨 의도에서 였는지. 설마 나이지리아를 대비해서 몸 풀라고? 아무튼 공수에서 선수 교체는 완벽한 실패였다.

사실 첫번째 실점은 박주영만을 탓하기엔 너무나 가혹한 처사이다. 분명 앞선에서 선수에 의해 시야가 가려져 있었고, 발을 뻗어보기도 전에 볼이 먼저 와서 닿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실점 이후였다. 실점 이전, 분명 전술적으로 그다지 좋은 전술은 아니었지만, 나름 짜임새 있게 수비를 하고 있다는 느낌은 있었다. 하지만, 실점 이후 수비 밸런스는 급격히 무너졌으며, 선수들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분명, 누군가가 선수 전체 분위기를 잡아줬어야 했고, 좀더 침착하게 그러면서도 적극적으로 수비했어야 했는데, 그저 공간만 차지한 채 멍하니 볼만 쳐다고 보고 있을 뿐이었다.

▲ 멍 때리고 있는 수비들 ⓒ itv sport 캡쳐


두번째 실점은 분명히 주지 않아도 될 골이었다. 사이드에서 얻어낸 프리킥을 저 지점까지 볼을 몰고와서 올렸던 크로스였기에 선수들 모두가 예상할 수 있었던 볼의 궤적이었고, 볼의 스피드도 그리 빠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전혀 볼을 따내지도 못했으며, 상대 선수를 제대로 마크하지도 못했다. 일대일로 마크해서 헤딩 경합만 해줬어도 막을 수 있는 실점이었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실점 이후 흔들렸던 선수들을 집중시키지 못한 탓이 컸다. 결국 경기가 자신들이 예상했던 방향과 달리 흘러갈 때, 이를 이겨낼 노련함이 경험적으로 부족했다고 볼 수 있다.

정리하자면, 전술, 선수 선발, 선수 교체, 경기 운영 모든 면에서 실패한 셈이다. 그런데, 이런 졸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가 나이지리아를 이겨줬으며, 나이지리아는 수비에도 많은 구멍이 생겼기에, 이제 나이지리아를 이기는 일만 남아 있다. 이런데도 16강 못가면 이건 진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실패이다. 그렇기에 다실점이 뼈아프긴 하지만, 아직 희망을 버릴 단계는 아니다.

그리고 자꾸 박주영을 빼라고 하는데, 솔직히 현재 대표팀에서 박주영을 대신할 선수가 없다. 그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안빠라서 안정환이 나왔으면 좋겠지만, 안정환은 박주영을 대신할 수 없다. 한방을 노린다면 후반에 잠깐 투입은 가능하겠지만 전체적인 기량에서 안정환이 박주영을 대신해 선발로 나갈 순 없다. 이동국? 이동국이 박주영만큼 헤딩 경합을 해줄 수 있으며, 상대 수비 라인을 한번에 무너트리는 동작으로 문전 찬스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나? 어림 없는 소리다. 이승렬? 분명, 스피드나 볼 다루는 센스는 있지만, 이승렬을 원톱으로 두기엔 무리가 있다. 결국 원톱이라면 박주영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아직도 정성훈이 아쉽다. 그리고 나이지리아전에 투톱이라면 개인적으로 박주영과 이승렬을 추천한다. 왼발잡이가 아닌 왼발 밖에 못 쓰는 염기훈은 이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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