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칫 신파로 흐를수도 있을 법한 과오를 범하지 않는 것이 <체인질링>의 가장 큰 매력이다. 다소 지루해질 뻔한 감정의 낭비를
절제라는 미덕으로 표현했으며, 영화가 진행될 수록 영화 초반에 나왔던 ture story란 단어의 섬뜻함이 피부 깊숙이 살떨리게
다가왔다. <체인질링>은 아이 잃은 엄마의 모성적 감성으로 스크린을 채워넣기 보단, 공권력이 개인에게 행하는 폭력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집중한다. 게다가 무려 80년의 시공간을 초월한 현실의 유효성에 관객들은 분노와 함께 무력감마저 느낀다. 1928년 LA에서 공권력이 개인과 소통하는 방법과 2009년 한국에서 공권력이 개인과 소통하는 방법에는 별반 차이가 없다.
그들은 그들의 과오를 인정할 줄 모른다. 모든 것이 오해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법치 앞에 최선을 다했다고 반복할 뿐이다.
잃어버렸던 아이가 돌아왔다. 하지만 그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다. 그런데, 그것은 오해란다. 제아무리 막장이라도, 다섯 달이란 시간이 흘렀더라도, 자식을 몰라 보는 부모는 없다. 몇 십년을 떨어져 있어도 서로 보면 땡기는게 핏줄이랬다고. 그럼에도 경찰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줄 모른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가 바뀜으로써 진짜 아이를 찾아야 할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것인데, 행여 자신들이 망신을 당할까봐 이러한 중요성은 무시해 버린다. 그저 언론을 통해 은폐하고 조작하기에 급급하다. 하지만, 속속 밝혀지는 증거들 앞에 경찰은 오히려 크리스틴 콜린스(안젤리나 졸리)를 정신병원에 집어넣는 만행마저 저지른다. 이미 이러한 방식은 경찰들의 만연한 행위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1928년의 LA엔 희망은 있다. 브리글렙 신부나 이바라 형사와 같은 사람이 있기에. 하지만, 2009년의 한국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뻔히 보이는 진실과 거짓의 바뀜 속에 모르는 것인지,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것인지, 아니면 콜린스처럼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갈까봐 두려워하는 것인지. 가슴 한켠이 먹먹해지는 이 기분이 무엇인란 말인가. 어쩌면 그들에게 체인질링은 그저 좌빨 영화 뿐일지도...
9.0점
잃어버렸던 아이가 돌아왔다. 하지만 그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다. 그런데, 그것은 오해란다. 제아무리 막장이라도, 다섯 달이란 시간이 흘렀더라도, 자식을 몰라 보는 부모는 없다. 몇 십년을 떨어져 있어도 서로 보면 땡기는게 핏줄이랬다고. 그럼에도 경찰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줄 모른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가 바뀜으로써 진짜 아이를 찾아야 할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것인데, 행여 자신들이 망신을 당할까봐 이러한 중요성은 무시해 버린다. 그저 언론을 통해 은폐하고 조작하기에 급급하다. 하지만, 속속 밝혀지는 증거들 앞에 경찰은 오히려 크리스틴 콜린스(안젤리나 졸리)를 정신병원에 집어넣는 만행마저 저지른다. 이미 이러한 방식은 경찰들의 만연한 행위였던 것이다.
I want my son back !!!!!!!!!
그럼에도 1928년의 LA엔 희망은 있다. 브리글렙 신부나 이바라 형사와 같은 사람이 있기에. 하지만, 2009년의 한국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뻔히 보이는 진실과 거짓의 바뀜 속에 모르는 것인지,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것인지, 아니면 콜린스처럼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갈까봐 두려워하는 것인지. 가슴 한켠이 먹먹해지는 이 기분이 무엇인란 말인가. 어쩌면 그들에게 체인질링은 그저 좌빨 영화 뿐일지도...
9.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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