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집이 망한 이후 한물 갔지만 그래도 청취율 1위의 라디오 DJ 남현수 앞에 꼬마를 대동한 20대 초반의 황정남이 찾아온다. 그러곤 다짜고짜 자신은 현수의 딸이며, 그녀의 아들 황기동은 현수의 손자라고 우긴다. 그럼 뒷얘기는 안봐도 뻔한거 아니가! 이젠 물릴대로 물린 '니가 내 애비다' 깜짝쑈에 손자까지 보태서 막나가는구나 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툭까놓고 말해서 <과속스캔들> 포스터를 보고 어느 누가 한치의 의심의 여지없이 영화표를 예매할 수 있겠냔 말이다.


저 따위 제목에, 저 따위 문구에, 게다가 차태현이 중간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으면 또 뻔한 영화 찍었네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조합이다. 하지만, 이런 비아냥은 영화가 시작되면 금세 증발해 버리고 만다. 물론, 이전 영화들과 다르지 않은 뻔한 전형성은 유지하고 있다. 당연히 남현수를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할테고, 불쑥 끼어든 모자가 그리 반갑지도 않다. 그리고 그의 평온했던 일상 속에 일어날 일들은 예상 가능한 범위 안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속스캔들>의 즐길만한 요소는 역시나 리듬감이다. 뻔한 도식 안에 인물들을 튀지 않게 절제시켜 편집에 리듬감을 더 했고, 억지 신파로 눈물을 짜내기 보단 듣기 좋은 노래와 음악으로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뻔한 줄기 안에서도 가지들을 잘 엮어내 식상하지 않은 맛을 더 했다.


이러한 활약의 일등공신은 역시나 박보영과 왕석현이다. 뻔한 엉뚱함이 식상할 법도 한데 그들의 가져다 준 신선함은 그러한 무리수를 불식시키기 충분했다. 특히, 황석현은 명랑만화의 주인공처럼 언제나 화면 가득히 큰 웃음을 선사했다. 올망똘망한 아이가 노인네마냥 모든 것을 다 안다듯한 투로 말할 때의 귀여움은 언제나 허용가능 범위 안에 있다.


차태현은 글쎄, 개인적으로 다른 배우였다면 좀더 신선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도, 딸에 손자까지 있을 법한 이미지에 능청맞은 연기를 잘 소화해 낼 연기자를 찾아보면 또 차태현이 제격이긴 하다. 결국 아쉬웠다면 차태현의 연기였다. 엽기녀에서부터 과하게 소비되었던 그의 연기가 이번에도 빛을 발함과 동시에 캐릭터 구분의 경계마저도 무너뜨려 버렸다.


그리고, 황우슬혜. 화면 가득히 화사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와 순간, '누구지?'라며 머리를 조아려도 도저히 생각해내지 못하다가, 그녀가 입을 열고서야 <미쓰 홍당무>의 이유리 선생인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녀의 발성이 원래 그러한 건지, 아니면 이번 캐릭터 역시 그러한 백치 미녀의 연장선인지, 아무튼 모호한 매력은 이번에도 충만히 빛을 발했다.


사실 <과속스캔들>를 보기 전에 낚일까 말까를 무지하게 고민했다. 이전에 <신기전> 떡밥을 덥썩 물었다가 오버이트한 이후, 함부로 상한 떡밥을 다시 물진 않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대치를 낮추고 연인과 함께 손을 잡고 극장에 들어선다면 즐길만 요소는 충분하다. 최소한 <미인도>의 저열함이나 <순정만화>의 공허함보다는 낫다. 아무튼 연말에 가족적 휴머니즘에 빠져 과속하지 않기를 바라며.

7.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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