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뜩 <미녀는 괴로워>가 떠올랐다. 제대로 보지도 않은 영화지만, <아름답다>와 대비되는 느낌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뚱뚱하고 못생겨서 비난과 조롱을 받던 김아중이 맡았던 그 역할의 그녀를 통해 외모지상주의를 꼬집었던 걸로 어렴풋이 기억된다. 아마도 내면의 아름다움이 더 중요하다고 얘기하고 싶었겠지. 하지만, <아름답다>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얘기를 꺼내고 있다. 너무 아름다워서, 그 아름다움 때문에 남들의 시기와 질투 혹은 편견과 불편을 겪는다면? 이러한 문제제기가 터무니없어 보일수도 있겠지만, 충분히 공감있고 현실성있게 다가온다.
너무나 아름다운 은영은 시종일관 남자들의 시선에 묶여 있다. 어딜가나 남자들은 오직 은영의 외모만을 소비하고, 여자들은 그런 은영을 질투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십년지기 친구마저도 은영의 그런 외모가 달갑지 않다. 그래서 은영은 외롭다. 혼자 산책을 할 수도 없으며, 조용히 음악을 들을 수도 없다. 아름다움이 자신의 족쇄가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이 아름다움은 파멸을 가져온다.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강간을 당하고 마는 은영과 강간 당하는 모습마저, 울부짖는 모습마저 아름다워서 그랬다는 성민은 바로 그러하다. 또, 그녀의 아름다움이 오히려 자신을 먼저 강간했다고 얘기하는 성민의 말처럼, 점점 그녀의 아름다움에 빠져 결국 같은 길을 가게되는 은철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은영 역시, 강간이후 폭식증과 거식증, 피해망상으로 인해 점점 피폐해져 간다. 이처럼 영화는 아름다움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낸다.
예부터 '미(美)'을 두고 하는 말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만큼 아름다움은 원초적인 욕망이고,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은 당연한 것이다. 미의 기준은 학습이 되었을지언정, 그 미의 향한 욕망은 시대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특히, 소비가 주를 이루는 현시대에선 그 미의 소비가 당연시 여겨지고, 그 아름다움이 지향점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모두가 아름다워지고 싶어하는 이 시대에 아름다움이 과연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성인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영화 속 남자들에 있어서 은영의 아름다움은 그저 쾌락의 도구일 뿐이다. 경찰서에서 나오는 은영을 도와준다고 달려드는 남자들이나 은영의 너무 아름다워 머리를 만져주고 싶다는 미용실 원장이나 아파서 쓰려진 은영을 바라보는 의사마저도 그저 은영의 외모에 구속됐을 뿐이다. 은영의 내면은 안중에도 없다. 그저 아름다움에 자신의 쾌락을 소비하면 될 뿐이다.
은철도 별반 다르지 않다. 마치 은영의 아름다움을 지켜주고 싶어하는 모습으로 비춰지지만, 은철도 마찬가지다. 그 아름다움을 간직해 자신이 소유하고 싶을 뿐이다. 그 소유의 결과물은 역시 섹스이다. 그저 아름다운 은영을 한번 품어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게 그토록 은영을 지키려했던 이유이다. 영화에 나오는 남성상은 대체로 이러한 모습으로 그러져고 있다. 하지만, 다들 지극히 정상이다. 아름다움을 쫒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본능이기 때문이다. 자, 이래도 과연 아름다워지고 싶은가라고 되묻고 있다. 아름다워져서 남성들의 딸감이되고 싶은가? 물론, 영화는 지극히 극단적인 단면의 단편만을 보여주는 듯 하지만 이러한 방향성있는 문제의식은 충분히 공감된다. 너무나 아름다운 나머지 전혀 아름답지 않은 운명에 처하게 된 은영을 보는 씁쓸함이란, 그리 쉽게 가시지 않는다.
<아름답다>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아님에도 포스터부터 김기덕 감독의 냄새가 풍겨난다. 포스터 뿐만 아니라 영화 전반이 그러하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색채나 인간 본성의 밑바닥을 긁어 들춰내는 듯한 감성은 <아름답다>를 참으로 김기덕스럽게 만드는 장치들이다. 그래서 한편으론 아쉽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아님에도 김기덕스럽다면, 그것은 감독이 자신만의 색채를 제대로 우려내지 못했단 의미이다. 물론, 원작이 김기덕이기에 그럴 수 밖에 없겠지만, 원래 김기덕 영화는 펜보단 현장에서 만들어가는 방식이다. 그런데 <아름답다>는 너무 시나리오에 의존한 느낌이다. 그저 주제만을 던져놨을 뿐 진지한 고민이 없어 보인다. <영화는 영화다>처럼 좀더 감독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냈으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영화 전반에 눈에 띄는 건 이천희보다 차수연이다. '미'의 절대적 상징을 의미하는 은영의 역할을 탁월하게 소화해 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영화 내적으로 외적으로 모두 빛났다. 약간은 이영애를 닮은 외모가 기억이 남는다. 그리고, 강간 당한 후의 그녀의 신들린 듯한 연기는 영화가 끝난 후에도 깊은 잔상으로 다가온다.
8.0점
너무나 아름다운 은영은 시종일관 남자들의 시선에 묶여 있다. 어딜가나 남자들은 오직 은영의 외모만을 소비하고, 여자들은 그런 은영을 질투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십년지기 친구마저도 은영의 그런 외모가 달갑지 않다. 그래서 은영은 외롭다. 혼자 산책을 할 수도 없으며, 조용히 음악을 들을 수도 없다. 아름다움이 자신의 족쇄가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이 아름다움은 파멸을 가져온다.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강간을 당하고 마는 은영과 강간 당하는 모습마저, 울부짖는 모습마저 아름다워서 그랬다는 성민은 바로 그러하다. 또, 그녀의 아름다움이 오히려 자신을 먼저 강간했다고 얘기하는 성민의 말처럼, 점점 그녀의 아름다움에 빠져 결국 같은 길을 가게되는 은철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은영 역시, 강간이후 폭식증과 거식증, 피해망상으로 인해 점점 피폐해져 간다. 이처럼 영화는 아름다움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낸다.
예부터 '미(美)'을 두고 하는 말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만큼 아름다움은 원초적인 욕망이고,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은 당연한 것이다. 미의 기준은 학습이 되었을지언정, 그 미의 향한 욕망은 시대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특히, 소비가 주를 이루는 현시대에선 그 미의 소비가 당연시 여겨지고, 그 아름다움이 지향점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모두가 아름다워지고 싶어하는 이 시대에 아름다움이 과연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성인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영화 속 남자들에 있어서 은영의 아름다움은 그저 쾌락의 도구일 뿐이다. 경찰서에서 나오는 은영을 도와준다고 달려드는 남자들이나 은영의 너무 아름다워 머리를 만져주고 싶다는 미용실 원장이나 아파서 쓰려진 은영을 바라보는 의사마저도 그저 은영의 외모에 구속됐을 뿐이다. 은영의 내면은 안중에도 없다. 그저 아름다움에 자신의 쾌락을 소비하면 될 뿐이다.
은철도 별반 다르지 않다. 마치 은영의 아름다움을 지켜주고 싶어하는 모습으로 비춰지지만, 은철도 마찬가지다. 그 아름다움을 간직해 자신이 소유하고 싶을 뿐이다. 그 소유의 결과물은 역시 섹스이다. 그저 아름다운 은영을 한번 품어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게 그토록 은영을 지키려했던 이유이다. 영화에 나오는 남성상은 대체로 이러한 모습으로 그러져고 있다. 하지만, 다들 지극히 정상이다. 아름다움을 쫒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본능이기 때문이다. 자, 이래도 과연 아름다워지고 싶은가라고 되묻고 있다. 아름다워져서 남성들의 딸감이되고 싶은가? 물론, 영화는 지극히 극단적인 단면의 단편만을 보여주는 듯 하지만 이러한 방향성있는 문제의식은 충분히 공감된다. 너무나 아름다운 나머지 전혀 아름답지 않은 운명에 처하게 된 은영을 보는 씁쓸함이란, 그리 쉽게 가시지 않는다.
<아름답다>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아님에도 포스터부터 김기덕 감독의 냄새가 풍겨난다. 포스터 뿐만 아니라 영화 전반이 그러하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색채나 인간 본성의 밑바닥을 긁어 들춰내는 듯한 감성은 <아름답다>를 참으로 김기덕스럽게 만드는 장치들이다. 그래서 한편으론 아쉽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아님에도 김기덕스럽다면, 그것은 감독이 자신만의 색채를 제대로 우려내지 못했단 의미이다. 물론, 원작이 김기덕이기에 그럴 수 밖에 없겠지만, 원래 김기덕 영화는 펜보단 현장에서 만들어가는 방식이다. 그런데 <아름답다>는 너무 시나리오에 의존한 느낌이다. 그저 주제만을 던져놨을 뿐 진지한 고민이 없어 보인다. <영화는 영화다>처럼 좀더 감독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냈으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영화 전반에 눈에 띄는 건 이천희보다 차수연이다. '미'의 절대적 상징을 의미하는 은영의 역할을 탁월하게 소화해 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영화 내적으로 외적으로 모두 빛났다. 약간은 이영애를 닮은 외모가 기억이 남는다. 그리고, 강간 당한 후의 그녀의 신들린 듯한 연기는 영화가 끝난 후에도 깊은 잔상으로 다가온다.
8.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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