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구리가 뿔났다. 자기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을 마구 부수고, 재개발이란 명목으로 자연을 훼손하고 있는 인간들을 이제 가만히 두고 볼 수 만은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금지되었던 변신술을 허용하여, 인간을 연구하기 위해, 티비 앞에 둘러 앉아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 자그마치 5년이란 시간 동안 말이다.


으쌰으쌰, 으라차차해서 명랑발랄쾌활하게 너구리의 승리로 끝나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인간이란 종족은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너구리와 인간과의 전쟁? 이외에 너구리들의 대응책을 마련해가는 과정과 방식에 있다.


인간세상도 예사 그렇듯 강경파와 온건파가 나왔으며, 그들은 합치되지 못한 채, 각자의 방법론으로 인간사에 대처한다. 흡사, 너구리가 인간을 흉내내는 듯 모습은 그리 썩 유쾌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의 액션에 대한 리액션이 예상과 달리 나왔을 때의 너구리들의 좌절감과 실망감에 동화되기도 한다. 또, 그 결과들이 씁쓸하고, 매서울 정도로 인간들과 닮아 있다. 사이비 종교가 생겨나 너구리들을 홀린다거나, 아예 그 환경을 떠나려 한다거나, 다시 인간들이 알아줄 때까지 자신들의 방식을 고집한다거나,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강경하고 단호하게 몰아부치는 다양한 반응들이 말이다. 뭐, 결론은 늘 그렇듯, 척박한 인간 세상에 너구리의 힘겨운 적응기만 남겨져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이렇듯 냉혹한 현실을 해악넘치는 유머와 기지로 풀어내는 방식이 탁월하다.


신대륙의 실체가 없듯, 강자의 논리에서만 바라봐 왔던 관점을 너구리의 관점에서 개발 논리의 잔인성을 바라보고 있다. 인간들의 보금자리를 위해 동물들의 보금자리를 빼앗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 공생의 방법론은 없는지, 더이상 무리가 남겨져 있지 않은 너구리들의 자연을 훼손하지 말아달라는 절규가 살갑게 다가온다. 인간들의 개발논리에 사라져 가는 그들의 보금자리는 어쩌면, 개발과 함께 매몰되어 가는 인간들, 그 자신이 아닌가 생각된다.

9.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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